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를 처음 읽었을 때 남다른 느낌과 감동이 있었다. 그 신선한 느낌이 두 번째 소설집 '내게 무해한 사람'을 읽게 만들었다.
이 책에는 미성년에서 이십 대 초반의 여린 감수성과 방황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어린 시절의 상처, 그리고 성장과정에서의 혼란이 있다. 젊은 작가의 섬세한 감정 묘사는 공감을 일으키기 충분했고, 글 전체에 아픈 청춘이 묻어난다.
'그 여름'을 비롯해서 총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 '모래로 지은 집'의 줄거리.
같은 고등학교 입학생 모임인 천리안 동호회 정모에서 모래, 공무, 나비는 처음 만난다. 모래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자신을 과시하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관대했다. 그 관대함은 더 가진 자 만이 지닐 수 있는 태도라고 나비는 생각한다.
공무는 직업군인이었던 강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살았다. 잘난 형과 늘 비교당했고 그 형에게 맞고 지냈다. 형은 세상에 대한 증오와 화풀이 대상으로 공무를 때렸다.
"왜 이해해야 하는 쪽은 언제나 정해져 있을까"
공무가 쓴 문장은 나비의 마음에 상처를 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미숙아로 태어나서 돈이 많이 들었다며 부모의 화풀이 대상으로 여겨지며 자라왔던 것이다.
나중에 더 훌륭한 아이가 되어 민폐인 내 존제에 대한 빚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훗날 와서 생각해보니 그것은 덜 상처 받고 싶어서 택한 비겁함이었다.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사람에게 연연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상하고 망가지고 비뚤어진다고 생각했으니까 구질구질하고 비뚤어진 인간이 되느니 차라리 초연하고 외로운 인간이 되는 편을 선택하고 싶었다.(112쪽)
너를 사랑해서 그런 거야. 너의 형도 아버지도 너를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 너도 어른이 되면 다 알게 될 거야. 그게 다 사랑이라는 걸.그때 나는 사랑이라는 말이 참 더럽다고 생각했어.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을 경멸하고 또 경멸할 거라고 다짐했어.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알리바이로 아무 짓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156쪽)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고 있는 부모의 체벌, 형제의 폭력.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절대 사랑일 수가 없다.
체벌과 폭력 후에 아이들은 반성을 할까. 폭력으로 잘못을 일깨워 준 가족에게 고마움을 느낄까.
절대 그렇지 않다. 폭력 후에 오는 것은 모멸감과 치욕이다. 그 때문에 아이들은 위축되면서 자란다.
그것은 훗날 지우지 못할 상처로 남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사람들이 내게 실망을 줬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보다 고통스러운 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망을 준 나 자신이었다. 나를 사랑할 준비가 된 사람조차 등을 돌리게 한 나의 메마름이었다. (180쪽)
지금껏 나는 사랑을 받으려고만 했다. 완벽한 사랑을 갈구하던 나는, 사람들이 처음처럼 완전하게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질책하고 원망했다.
사랑이 아니라고 떠나왔다. 그들이 나에게 어떤 것을 원하고, 내가 어떤 따뜻한 사람이길 바라는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 황당한 이기심.
사랑처럼 불공평한 감정은 없는 것 같다고 나는 종종 생각한다. 아무리 둘이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더 사랑하는 사람과 덜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누군가가 비참해서도, 누군가가 비열해서도 아니라 사랑의 모양이 그래서. (181쪽)
사랑의 감정은 둘에게 공평하게 나눠지지 않는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더 사랑하는 만큼 외롭고, 더 사랑하는 만큼 아프고, 더 사랑하는 만큼 공허하다.
사랑의 깊이만큼 비굴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 생에서 떼놓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돌이켜보면 작은 아이였을 때나, 청소년 때나, 다 자라서 어른이 되어서도 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사랑이었다.
사람과 사람들과의 관계, 감정, 사랑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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