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추리소설과 공포소설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최근 읽기 시작한 김영하 작가의 장편이어서 읽어보게 되었다. 제목에서부터 좀 꺼림칙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소설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마르코 폴로처럼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여행하는 것에 가깝다. 우선은 그들이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 처음 방문하는 그 낯선 세계에서 나는 허용된 시간만큼만 머물 수 있다. 그들이 '때가 되었다'라고 말하면 나는 떠나야 한다. 더 머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또다시 낯선 인물들로 가득한 세계를 찾아 방랑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참 편해졌다.-작가의 말
알츠하이머에 걸린 70세의 노인 김병수. 그는 30년 동안 살인을 해 오다가 25년 전에 은퇴했다. 딸 은희 주변에서 맴도는 새로운 연쇄살인범 박주태에게서 딸을 지켜내려 한다. 알츠하이머는 가장 최근 기억부터 사라진다고 하니, 차츰 사라져 가는 기억을 잡으려 메모를 하고, 녹음을 하면서 은희 옆에서 박주태를 떼 놓으려 애를 쓴다.
그런데 후반부에 가면 반전이 온다. 경찰에 의해, 딸 은희가 잔혹하게 살해되었음이 밝혀지는데 범인이 박주태가 아니라 김병수 자신이 한 거라고.. 그리고 은희는 지키고자 했던 딸이 아니라 자신을 간호해주는 요양보호사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은 김병수의 망상이었던가? 그가 생각하는 연쇄살인범 박주태는 존재하기나 했던 인물일까?
나는 타인과 어울려 함께하는 일에서 기쁨을 얻어본 기억이 없다. 나는 언제나 내 안으로 깊이깊이 파고 들어갔고, 그 안에서 오래 지속되는 쾌락을 찾았다. 뱀을 애완용으로 키우는 이들이 햄스터를 사들이듯이, 내 안의 괴물도 늘 먹이를 필요로 했다. 타인은 그럴 때만 내게 의미가 있었다.(92쪽)
김병수의 치매가 심해져서 집에서 돌보는 일이 힘들어진 은희는 요양병원을 구경시켜주면서 사람들과 어울려 같이 지내는 것도 재밌는 일이라고 설득한다. 노인들은 그를 환대했지만 그는 마뜩잖다. 내가 추구하는 즐거움에는 타인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노인들이 손뼉 치며 좋아하는 것을 보며 오히려 그들을 혐오하게 된다.
타인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내 안에서 기쁨을 얻는 것은 나하고 비슷하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타인들과의 관계가 즐겁지 않았다. 내게 있어서 타인은 두려움이다.
"그러므로 공空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 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148쪽)
경찰은 김병수에게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얘기를 계속했고, 몸을 가눌 수없이 피곤해질 정도로 추궁한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가 없는 말 뿐이다. 그는 외우고 있던 반야심경의 구절을 내내 읊조린다.
그가 목숨을 걸고 연쇄살인범으로부터 지키고자했던 딸 은희는 원래 없었고,
은희가 없으니 박주태도 없었고.. 대 혼란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속에서 혼란스러워해야 하는 고통과 공포가 흉악한 살인범 윤병수의 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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