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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친절한 복희씨 / 박완서

작가 박완서 님의 글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처음 접했다. 그 후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등을 읽었다. 작가는 1970년 불혹의 나이에 <여성동아>에 '나목'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수많은 작품을 출간했고 그녀의 소설은 여성 특유의 현실적인 감각으로 쓰여서 이해하기 쉽고 재미가 있다.

이 책은 '그리움을 위하여' 등  총 9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그리움을 위하여

그 남자네 집

마흔아홉 살

후남아, 밥 먹어라

거저나 마찬가지

촛불 밝힌 식탁

대범한 밥상

친절한 복희씨

그래도 해피 엔드

(그리움을 위하여)

그립다는 느낌은 축복이다. 그동안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았다. 그릴 것 없이 살았으므로 내 마음이 얼마나 메말랐는지도 느끼지 못했다. 우리 아이들은 내년 여름엔 이모님이 시집간 섬으로 피서를 가자고 지금부터 벼르지만 난 안 가고 싶다. 나의 그리움을 위해. (40쪽)

화자의 여덟 살 아래인 사촌동생은 어릴 때 공부를 못해 대학을 포기하며 동생들을 뒷바라지하며 살았다. 그러다 열두 살 연상 유부남과 결혼해서 남편과 자식들만을 위한 삶을 살다 과부가 된다. 여유롭지 못하게 사는 그녀는 화자의 살림을 파출부처럼 도와주며 살았다.

동생은 친구의 주선으로 남해로 가서 유복한 선주를 만나 재혼하며 행복을 누린다. 화자는 처음에는 그런 그녀가 질투도 나고 서운하다. 동생에게 항상 베푸는 입장이라는 우월감을 갖고 있었지만, 자매애로 바뀌게 되며 그녀를 그리워한다.

(그 남자네 집)

쌍쌍이 붙어 앉아 서로를 진하게 애무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늙은이 하나가 들어가든 나가든 아랑곳없으련만 나는 마치 그들이 그 옛날의 내 외설스러운 순결주의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뒤꼭지가 머쓱했다. 온 세상이 저 애들 놀아나라고 깔아놓은 멍석인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래, 실컷 젊음을 낭비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란다. (78쪽)

불행도 겪고, 슬픔도 지나가고, 사랑도 지나갔다. 화자는 젊은이들이 가는 찻집에 앉았다. 아름다운 청년과 구슬 같은 처녀 적에 사랑을 했던 시절을 돌아본다. 자리가 꽉 차서 돌아나가는 연인들을 보며 주인의 시선이 따갑다. 마지못해 자리를 뜨며 젊은이들한테 삐치려는 마음을 다독인다.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고. 

(마흔아홉 살)

"손자 보고 기껏 한다는 생각이, 저것만 안 생겨났어도 내 아들이 그 본데없는 여자에게 발목이 잡히지 않았을걸 싶은 내 마음은 정말 싫지만 잘 극복이 안 돼. 내일모레 백날 치를 생각을 해도 부담스럽기만 하지 하나도 안 기뻐. 만일 그 애들이 내 속을 들여다본다면 얼마나 정이 떨어지겠니. 모든 인간관계 속엔 위선이 불가피하게 개입하게 돼 있어. 꼭 필요한 윤활유야." 

독거노인들을 위한 봉사모임을 이끌어가는 회장 카타리나는 회원들이 자신과 시아버지 팬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엿듣고 기분이 언짢다. 회원들은 그녀를 이중인격, 독종, 엽기라며 험담을 한다. 카타리나는 친구와 둘이 앉아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걸 인정하면서 자신도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녀는 친구의 진심 어린 위로의 말을 고맙게 받아들이지만 위선도 용기도 둘 다 자신이 없어서 설움이 복받친다. 

(거저나 마찬가지)

내가 살아온 길은 구불구불하다. 그건 극적인 것 하고는 다르다. 극적인 삶은 아마도 푸른 하늘을 선명하게 긋는 비행운처럼 아름다운 직선일 것이다. 먼 곳에서 먼 곳까지의 거침없는 최단거리, 나는 아무리 아름다운 구름을 보고도 감동한 적이 없지만 비행운은 볼 때마다 내 존재의 무게가 사라지는 듯한 일종의 무아지경에 빠지곤 한다. (156쪽)

화자는 어른들이 나이를 헛먹었다고 여기는 자신의 존재가 못마땅해서 좀 더 그럴듯해 보이게 살고 싶지만 마음대로 안된다. 선배 언니의 시골집을  500을 주고 전세를 얻어 살고 있으면서도 '거저나 마찬가지'의 더부살이나 별장지기쯤으로 취급당하며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이끄는 대로 끌려간다. 언니 부부는 위장취업자 시절은 망각하고, 시국이 바뀌어 승승장구하면서 나를 더욱더 우습게 보고 '거저 나 마찬가지'라며 막 대한다. 인간사회의 허위와 위선을 실감하며 바닥도 없이 전락한다.

(친절한 복희 씨)

나는 오랫동안 간직해온 죽음의 상자를 주머니에서 꺼내 검은 강을 향해 힘껏 던진다....... 그가 죽고 내가 죽는다 해도 이 세상엔 그만한 흔적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허공에서 치마 두른 한 여자가 한 남자의 깍짓동만 한 허리를 껴안고 일단 하늘 높이 비상해 찰나의 자유를 맛보고 나서 곧장 강물로 추락하는 환을, 인생 절정의 순간이 이러리라 싶게 터질듯한 환희로 지켜본다. (264쪽)  

지금은 중풍으로 누워있는 남편. 복희는 젊을 때 그의 점원으로 들어가서  식모살이도 겸해서 했다. 그에게 강제로 겁탈을 당한 후 어쩔 수없이 후처로 들어가 같이 살게 된다. 지금 늙고 병든 그를 보며 측은한 생각이 들기보다는 기괴한 환상에 시달린다. 더는 운명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며 오래 간직한 아편이 든 상자를 강에 내던진다.

작가의 작품 속 인물들이 거의 노인 실버 세대들이다. 정년퇴직 후 현장에서 물러 난 노인부부이거나, 늙은 과부, 노후의 삶을 사는 화자.. 

박완서 작가의  노년의 문학적 정서와 그리움이 작품 속에 잘 스며들어있다.

엄숙하고 무게있는, 그리고 여성의 감수성이 잘 그려진 작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