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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내 생애 단 한번 / 장영희

<내 생애 단 한번>의 저자 장영희는 철저하게 엄격하며 꼬장꼬장한 교수이지만 교실 밖에서는 정 많고 이해심 많은 선배이다.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남다른 아픔도 있었을 터이지만 너무 많이 웃어 눈가에 웃음 주름이 걸렸다. 유명한 아버지 영문학자 장왕록 박사 때문에 덩달아 유명해졌다고 말하지만, 그녀의 칼럼을 한 줄이라도 읽은 이라면 그녀의 글맛을 잊지 못한다.

생후 1년 만에 소아마비를 앓아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었고, 그 후 세 번의 암투병 속에서도 수필과 칼럼을 통해 따뜻한 글을 전하였다. 간암으로 전이되어 투병 중 2009년 사망했다. 수필집으로 <내 생애 단 한번> <문학의 숲을 거닐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등이 있다. 이 책 <내 생애 단 한번>으로 2002년 '올해의 문장상'을 수상했다.

꿀벌은 몸통에 비해 날개가 너무 작아서 원래는 제대로 날 수 없는 몸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꿀벌은 자기가 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당연히 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열심히 날갯짓을 함으로써 정말로 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얼마나 신빙성 있는 말인지 모르지만, 내가 글을 쓰는 것도 어쩌면 꿀벌의 무지와 같은 것이다.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대학 다닐 때부터 글쓰기는 곧 영어로 쓰는 것을 의미했고, 한 번도 우리말로 글 쓰는 것에 관심을 가지거나 훈련을 받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꿀벌과 같이 그냥 무심히 날갯짓을 한다. 그러므로 나의 글은 재능이 아니라 본능이다. 머릿속에 있는 말보다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고르지도, 다듬지도 않고 생긴 그대로 투박한 글로 옮긴다.-작가의 서문에서

 <내 생애 단 한번은> '샘터'에서 펴낸 에세이집이다. 여기에 실린 글 중 상당수가 월간지 '샘터'에 실렸던 글들이다.

작가의 글에는 각기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온갖 감정들이 가식 없이 묻어있다.

과장해서 드러내려고도 하지 않고 화려한 미사여구를 쓰지도 않았다.

작가는 서문에서, 머리보다는 가슴에 있는 말을 그대로 가져와서 투박하게 옮겼다고 한다.

작가의 솔직담백한 문장에 따뜻함이 담겨있고 책을 술술 읽히게 한다.

이 가을에 잔잔한 감동을 주는 책 한 권으로 마음의 여유를 찾아보는 것도 좋을듯하다.

이 책은 총 4개의 챕터로 되어있다

서문-꿀벌의 무지

1 아프게 짝사랑하라

2 막다른 골목

3 더 큰 세상으로

4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

 그중 세번째 장에 실린 [못 줄 이유]를 옮겨와 본다. 

지난 주일에는 식구들과 시간이 안 맞아 혼자 저녁 7시 미사에 갔다. 그런데 신부님이 그날의 성경 구절을 '나눔'의 메시지와 연관시켜 강론하시다가 갑자기 무엇이든 좋으니 옆사람과 나누어보라고 하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가방이나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서로 나눌 물건들을 찾기 시작했다. 봉헌금만 가지고 달랑 맨몸으로 갔던 나는 당황했다. 아무리 주머니를 뒤져 봐도 차 키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차 키를 준다?하 말도 안 되지. 그럼 뭐가 있을까. 궁여지책으로 내 몸뚱이에 걸친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목에 맨 스카프? 백 퍼센트 실크이니 아마 2,3만 원은 할걸. 귀고리로 말하자면 금 아닌가, 금. 한 돈쯤 된다 쳐도 5만 원은 할 것이다. 목걸이는 아마 더 비싸겠지? 대충 6,7만 원?

평상시, 숫자라면 백치에 가깝도록 무능한 나의 두뇌가 '못 줄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놀랍게도 섬광처럼 빠른 속도로 내가 지닌 물건들의 가격을 계산하고 있었다. 내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실반지, 이것은 가격으로야  얼마 나가지 않겠지만 학생들이 해 준 선물이다.

못주지, 암, 못 주고말고, 그럼 재킷? 낡긴 했어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옷이고 이맘때쯤이면 교복처럼 입는 옷이니 그것도 줄 수없다. 그검, 거기에 꽂힌 브로치? 하지만 세트로 된 것이라 하나를 줘 버리면 나머지는 짝짝이가 될 터라 그것도 못 주겠고....

옆에 앉으신 할머니는 이미 무엇인가를 내게 내밀고 있었다. 어쩌나, 어쩔거나. 그런데 무심히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아, 다행이, 너무나도 다행이, 며칠 전 음식점에서 입가심으로 준 박하사탕 하나가 집혔다. 원래 박하사탕을 싫어하기 때문에 먹지 않고, 그나마 버리는 수고가 아까워 그냥  넣어 두었던 물건이었다.  

'주님, 감사합니다!'

아이로니컬 하게도 나는 내게 필요 없는 물건, 아니 오히려 주어 버려서 속 시원한 물건을 발견하게 해 주신 데 대해 하느님께 감사하며 사탕을 할머니께 내밀었다. 할머니도 무엇인가를 내 손에 쥐어 주었는데, 그것은 아주 조그맣고 예쁜 병에 든 '구심求心'이라는 심장약이었다.

신부님은 "작은 물건이라도 옆사람과 나누는 기쁨이 어떠냐"고 물었다. 과연 사람들의 얼굴들이 환한 미소로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미소를 담을 수 없었다. 나는 항상 내가 신심은 좀 부족해도 그런대로 하느님의 뜻에 크게 벗어나지 않게 선하고 올곧게 살아간다고 믿었다.

아니, 어떤 때는 오히려 선하기 때문에 손해 보며 산다고 억울하게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데 그건 순전히 구차한 자기 합리화였다.

옆에 앉은 할머니의 행색이 옹색해 보여서 날씨가 추운데 할머니 재킷이 내 것보다 얇아 보여서. '구심'을 내어 놓은 할머니의 마음이 너무나 고마워서 등 '줄 이유'를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는데도, 거의 조건 반사적으로 '못 줄 이유'를 찾은 것은 아마도 이제껏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다져 온 나의 마음가짐 탓일 것이다.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미워할 때 그를 '용서해야 할 이유' 보다는 '용서하지 못할 이유'를 먼저 찾고,

누군가를 비난하면서 그를 '좋아해야 할 이유' 보다는 '좋아하지 않을 이유'를 먼저 찾고,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아건 채 누군가를 '사랑해야 할 이유' 보다는 '사랑하지 못할 이유'를 먼저 찾지는 않았는지. (1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