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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칼자국 / 김애란

칼자국은 2008년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10년 전쯤에 처음 읽었다. 좋아하는 젊은 작가의 작품이라 다시 천천히 읽어보고 싶었다.

작가 김애란은 1980년 인천에서 태어나 서산에서 자랐으며, 한국예술 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를 졸업했다. 2002년 제1회 대산 대학문학상에 <노크하지 않는 집>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2008년 '칼자국'으로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소설집으로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 <두근두근 내 인생><바깥은 여름><비행운>등이 있다. 

[줄거리]

20년 넘게 국숫집을 하며 평생 칼을 써서 가족의 생계를 지고 살아가야 했던 어머니. 어렵게 자신을 키운 어머니의 삶을 옆에서 지켜본 화자. 무능한 아버지를 대신해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 했던 어머니이기에 가슴이 아프다.

내가 끊임없이 먹어야 했던 것처럼 어머니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도마질 소리는 맥박처럼 집안을 메웠고 그런 어머니를 보면 새끼처럼 게을러지고 싶었다. 화자는 어머니의 칼에서 사랑이나 희생이 아니라 그냥 '어미'를 본다.

어머니는 '맛나당'에서 국수를 팔았다. 국수를 삶으면 갓익은 면발 한두 젓가락을 건져주면서 맨손으로 김치를 입속에 넣어주었다. 내 입속으로 들어오는 어머니의 담담한 손가락 맛. 어머니는 손님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쳐도 누가 먼저 왔는지 알았고 음식 나가는 순서를 칼같이 지켰다.

어머니가 인상 깊게 기억하는 손님이 있다. 한 남자가 들어와 국수 두 개를 시켰는데 그는 빈그릇을 맞은편 국수 위에 올려놓았다. 늦게 오는 여자의 국수가 식을까 봐 그러는 거였다. 잠시 후 머리를 맞댄 채 국수를 먹는 두 사람을 보고 어머니는 멍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사소한 따뜻함을 받아보지 못한 여자의 눈. 

어머니는 현실적인 여자였다. 순서와 계획대로 합리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해나갔다. 반면 아버지는 순간을 사는 사람이었다. 자기가 번 돈은 자신을 위해 썼고 낙천적이었다. 거절을 못하는 난감한 사람 아버지는 우선 선뜻 승낙해놓고 뒤처리는 어머니가 다한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외도한 동네 때밀이 여자를 찾아가 몰래 훔쳐보고 와서 "그 여자 완전 할매더라, 할매." 하며 웃으면서도 이내 시무룩해진다. 만나도 왜 그런 여자를 만나는지 모르겠다며.

그런 어머니가 국수를 삶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죽기 전까지 음식의 간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육개장 냄새가 너무 싫다. 그 냄새는 장례식장 주위를 메우며 나쁜 꿈처럼 둥둥 떠다녔다. 임신 중인 나는 아무것도 넘길 수가 없다. 아버지의 속옷을 챙기러 들어간 '맛나당'에서 도마 위에 있는 어머니의 칼을 본다. 갑자기 식욕이 밀려와 단 한 번의 끊어짐 없이 껍질을 길게 벗겨내고 사과를 맛있게 한입 베어 문다.

나는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과 함께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혈관을 타고 다니며 나를 건드린다. 내게 어미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기관들이 다 아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물리적으로 이해한다.

어떻게 바람난 아버지를 위해 갈치를 굽고, 가지를 무치고, 붕어를 지질 수 있는지. 그것도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으로만 말이다. 그것은 어머니가 엉겁결에 찾아낸 떳떳함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누군가는 그것을 실수라, 누군가는 사랑이라, 누군가는 불륜이라 했다. 나는 그것의 온당한 이름을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건, 당시 동네 주위로 내가 알 수 없는 정념의 에너지가 청어 떼를 살찌우는 오호츠크 해류처럼 도저하게 흐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화자는 아버지의 외도가 신경 쓰였다. 그것은 자식들을 버릴까 봐서도 아니었고, 도덕적 잣대 때문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하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존심을 지키려는 듯 매일 갖다 주는 돈이라도 거르지 말아 달라한다. 

옛날의 어머니들은 다수의 사람들이 수십 년간을 그렇게 살아가지 않았을까.

여자로서 할 일은 다 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도 만든다. 책임을 다 했으니 물론 떳떳함도 있을 테고..

배우자의 외도 상대가 본인보다 나이도 들었고 이쁘지 않으면 안심이 되다가도, 내가 저런 여자보다 못한가 하는 생각에 더 비참해지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겉으로 표현은 절대 하지 않는 자존심. 

책을 읽으면서 내내 엄마가 만들어주는 따뜻한 칼국수가 먹고 싶어졌다.

오늘같이 궂은 날씨와도 맞아떨어지는.